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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사학

[독일역사] 카셀과 메르헨의 기억정치: 그림형제를 기억하는 방식

by 예별 YeByeoll 2025. 5. 11.

동화는 누구의 기억인가?

  독일 중부의 도시 카셀(Kassel)은 오늘날 ‘동화의 도시’로 불린다. 도심 곳곳에 그림형제(Brüder Grimm)의 흔적이 스며 있으며, 동화 속 주인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동화 박물관, 학술 행사들이 도시의 문화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카셀이 기억하는 그림형제는 어떤 이미지이며, 그 방식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그림형제, 학자이자 수집가

  야코프 그림(Jacob Grimm)과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이들은 19세기 초 독일 민속학과 언어학, 문헌학의 기초를 닦은 지식인 계몽의 실천자였다. 이들이 카셀에 머물며 민중 설화를 수집하고 정리한 작업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림 동화집(Grimms Märchen)'의 출발점이 된다. 카셀 궁정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며, 언어와 민속 사이의 관계를 탐색한 이들은 ‘순수하고 독일적인 것’을 발굴하고 보존하려 했다.

  이들의 작업은 단순한 향토적 민담을 모은 것이 아니라, 독일이라는 민족 정체성과 언어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문화적 전략이었다.

메르헨의 기억, 도시의 브랜딩

  오늘날 카셀은 그림형제를 도시 마케팅의 핵심 키워드로 활용한다. ‘그림 루트(Deutsche Märchenstraße)’의 중심지이자, 그림형제 박물관, 동화 테마 산책로, 동화 축제 등 다양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2005년 개관한 ‘그림 형제 세계(GRIMMWELT Kassel)’는 전시·체험·연구를 결합한 복합 공간으로, 학문과 관광, 놀이가 교차하는 구조를 지닌다.

  이는 단지 역사적 인물의 기념을 넘어서, **지역 정체성과 관광 산업의 결합이라는 ‘기억의 정치학’**을 보여주는 사례다. 카셀이 선택한 그림형제는 단순한 옛날이야기의 작가가 아니라, 동화의 힘을 빌려 공동체 서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상징 자원으로 기능한다.

과거를 소비하는 방식의 고민

  그러나 이러한 기억의 연출은 비판적으로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림형제의 동화는 본래 어둡고 폭력적인 요소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지만, 현대의 카셀은 이를 가족친화적이고 순화된 이미지로 재구성하고 있다. 또한 동화 속 여성 캐릭터들의 역할, 계급적 맥락, 민속 전통의 왜곡 문제도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즉, 기억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카셀이라는 공간은 실제 역사와 현대의 소비적 재현이 교차하는 장소이며, 이는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학문과 관광, 그 사이의 균형

  흥미롭게도 카셀은 그림형제의 학문적 유산 또한 적극적으로 기념한다. 독일어 사전 편찬 프로젝트, 독일 민속학 연구의 시초, 인도유럽어 비교언어학 등 그들의 지적 업적을 중심으로 한 학술 활동이 병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놀이의 장소’만은 아니다. 기억과 교육, 유산과 비판이 공존하는 방식은 카셀의 기억정치가 단선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무리하며

  카셀은 기억을 통해 자신을 정체화하고, 그 기억을 다시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세계와 소통하고 있다. 동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누구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선택이다.

  그림형제는 여전히 살아 있다. 다만 그들이 전한 동화는, 이제 카셀이라는 도시 공간 속에서 다시 쓰이고, 다시 말해지고 있다.

 

카셀의 그림형제